외지인과 일광, 그리고 무명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수차례의 인터뷰에서 나홍진 감독은 무명은 어떤 식으로 보던 선과 신 같은 존재이다.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감독의 말을 토대로 논리적인 추론을 한다면 영화를 단순화시킬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명이 선이라면, 집 앞의 해골 모양의 꽃을 걸어두는 무명의 행위는 선한 행동이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무명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명의 행위가 선한 행동이라면 무명이 막으려고하는 외지인과 일광의 행위는 무슨 행동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을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런 행동들을 하는 외지인과 일광은 악한 존재인 것입니다. 실제로 삭제된 장면에서 외지인과 무명이 직접적인 몸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외지인과 일광이 무명에 의해서 차 사고를 당하게 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명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다라는 감독의 말을 전제로 하였을때, 이 영화는 설정상에서 대립 구도가 명확하고 선악 설정도 이분법적으로 명확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다른 영화와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우리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되어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들을 인지한 상태에서 영화를 관찰하게 됩니다. 나홍진 감독의 이전 작품 추격자에서는 희대한 사이코 살인마 유영철은 연기한 하정우가 연기를 했는데 우리가 하정우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긴장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한 슈퍼 아줌마는 하정우가 범인인 것을 모릅니다.
관객은 영화 속에 등장인물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객관적인 객관적인 시각을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동안 접하는 정보는 객관적인 시각이 아닌 소문, 상상, 꿈과 같은 다소 주관적인 정보들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대부분 관객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주지 않으므로 '외지인은 나쁜 놈이니까 잡아야 해'라는 감정 대신에 '나쁜 놈이 맞는가?'라고 의심하게 만들고 무명의 말을 듣지 않은 종구를 보면서 '집으로 가면 안 돼'라는 생각보다 집으로 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객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허우적거리는 종구와 동등한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나홍진 감독은 이런 영화 속 설정들을 통해서 분명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관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종구의 입장에서 상황을 체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관찰이 아닌 체험으로 만든 것입니다.
관습을 이용한 현혹
앞에서 얘기했듯이 객관적인 시점의 붕괴는 이 영화의 명확한 대립 관계를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감독은 한가지 함정을 더 넣었습니다. 바로 관습을 이용한 현혹입니다. 보통 해골은 관습적으로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줍니다. 그렇게 무명이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해골 모양의 꽃이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사실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꽃이었습니다. 황정민은 베테랑, 국제시장, 히말라야같은 최근의 영화에서 항상 친근하고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배우입니다. 이런 그의 이미지 덕분에 그의 등장은 우리에게 안심을 주게 만듭니다.
황정민이라는 배우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뢰감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관습을 이용한 현혹은 연출에서도 이용됩니다. 영화 내내 카리스마와 신비주의를 유지하던 외지인이 갑자기 친근하고 서민적인 공간에서 시장과 버스에 등장하게 함으로써 '정말 악마가 맞는가?'라고 의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객관적이지 못한 정보를 주지 않고 관습을 이용한 현혹을 통해 우리는 명확한 설정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으니라."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의 주제를 표현하는 분명한 길을 보여 주기 위해 성경을 인용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 구절은 분명 이 복잡해보이는 이 영화를 풀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성경 구절은 예수가 부활 후에 돌아온 자신이 예수임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인 예수의 대한 믿음이 배척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감독이 밝힌 절대적인 선한 존재인 무명에 대한 믿음이 중시되고 의심이 배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독의 말에 근거해서 바라본다면 이것은 객관적인 정보가 주어지지 않고 관습을 이용해서 연출한 이 영화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입니다. 무명에 대한 믿음이 선, 그리고 무명에 대한 의심이 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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